시골에서 온 듯한 아주머니 한 분이 장경각에서 내려오면서 나를 보더니 불쑥 팔만대장경이 어디 있으냐고 물었다.
방금 보고 내려오지 않았느냐고 하자, "아, 그 빨래판 같은 것이요?" 라고 되물었다.
'빨래판 같은 것'이라는 이 말이 내 가슴에 화살처럼 꽂혔다.
아무리 뛰어난 지혜와 자비의 가르침이라 할지라도 알아 볼 수 없는 글자로 남아 있는 한 그것은 한낱 빨래판 같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.
이때 받은 충격으로 그해 여름 안거를 마치고 나는 강원으로 내려가 경전을 배우고 익혔다.
국보요, 법보라고 해서 귀하게 모시는 대장경판이지만, 그 뜻이 일반에게 전달되지 않을 때는 한낱 빨래판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나를 끝없이 부추겼다.
어떻게 하면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쉬운 말과 글로 옮겨 전할 것인가, 이것이 그 때 내게 주어진 한 과제였다.
- 버리고 떠나기, 법정스님 p277~278, 1991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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